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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술의 개요


오늘날 우리 나라의 무술인들은 대부분 무술의 근원을 중국으로만 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소림사의 창건 스님으로 알려진 달마대사를 온갖 무술의 원조로 알고 있는데 이는 옳은 생 각이 아니라 사대주의에 젖은 그릇된 생각이다.

무술이란 본래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 혹은 나라에서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사시대 부터 원시인들이 먹이를 구하거나 맹수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시 작된 자연발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어느 지역이나 나라를 막론하고 체력과 정신력 단련 및 싸움 등을 위한 그 나라 고유의 각종 투기의 기예들이 있으며 또한 온간 종류의 무기들도 발달하기 마련이 었다.

이와 같은 무기들 중에는 세계 각국에서 발굴된 여러 종류의 타제석기나 마제석기들이 있으 며 우리 나라에서도 함경북도의 경홍, 성진, 부령, 회령, 경성으로부터 평안도 일원, 황해도 의 해주, 안악, 강원도의 양양, 춘천, 경기도의 안성, 충남의 부여, 경의 안동, 경주, 및 경남 의 밀양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석검, 석도, 석창, 석촉, 석부 등이 출토된바 있다.

이같은 석류의 무기들은 당시의 우리 조상들이 먹이를 구하는 도구로 또는 맹수나 사나운 적으로부터 지키는 호신무기로 사용하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당시의 선사인들이 돌을 던지던 기술은 오늘날까지도 투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임 진왜란때 행주산성과 진주성 싸움에서 아낌없이 그 위력을 발휘한 바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투석은 신라때 투호라는 이름의 경기용 놀이로 발달되어 왕족과 선비들이 즐겼 다는 기록이 있으며 투검, 표창 등으로 발달하는 모체가 되었고 궁술의 기원이 되었음을 짐 작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농경생활로 접어든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점점 환경이 좋은 남으로 내려와서 정착 을 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전투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그것은 영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 짐작한다.

정착생활은 집단을 이루는 단체생활로서 씨족단위에서 부족단위로 옮겨짐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다른 부족과의 사이에 생기는 암투나 쟁투로부터 자기의 집 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른 부족보다 월등한 힘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와 같은 힘 을 기르기 위해서 달리기, 던지기, 수영, 격투 등의 기법으로 체력을 단련하였으며 봉, 창, 검, 활, 도끼와 같은 기본적인 무기의 발달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고대무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드물고 다만 삼국사기에 보면 가락국에 쌍검무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기록에 그칠 뿐이며 삼국유사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장수들이 다투어 열심히 무예를 수련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지 무술 또는 무예의 기법에 대한 해설은 없지만 당시 삼국이 힘의 우열을 다투는 시대상으로 보아 무예에 뛰어 난 수많은 장졸이 있었음은 확실하고 또 그들의 대부분이 스승이나 기록된 무술서적에 의하 여 무예를 수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각종 무예의 술기가 상세히 해설된 책자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문헌이나 벽화 또는 조각에 나타난 것을 보면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쏜다던가 궁사, 석전, 격구. 수렵 등이 집단적으로 행하여 졌고 기문한 자세로 서 있거나 둘이 마주보고 겨 루는 장면 혹은 많은 사람이 서로 겨루는 장면들이 많은데 이것은 곧 무술의 한 동작으로 적과 겨룰 때의 공격과 방어자세인 것으로 오늘날의 맨손 무술에도 그와 비슷한 자세가 있다.

이 외에 삼국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축국, 투호, 수박, 추천, 저포, 죽마, 검구등 이 있는데 이 역시 체력단련과 무술을 수련하는 술기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에 서 발행된 삼국지동이열전에 보면 각저, 목저, 각력, 각희, 상박, 개웅회 혹은 졸교, 송교, 쟁 교등의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맨손 무술의 일종으로 신라에서 행하던 수박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우리나라 고유의 맨손 무술을 중국에서는 고려기 도는 요교라 하여 대단히 위력있고 뛰어났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이 시조인 주몽왕의 주몽이란 이름은 당시 부여에서 활을 잘 쪼는 사람에게 붙여주던 위대한 용사의 별칭임을 언어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젊은이들의 조직인 화랑도가 있어서 빼어난 젊은이들 중에서 화랑과 낭도들을 뽑아 산천을 편력하며 국토 지리를 익히고 심신을 단련하며 무예를 익혀서 싸움에 임하여 결코 물러나지 말라는 임전무퇴의 강인한 정신을 계율로 정한 것을 보아도 이미 그 시대의 재배자들은 자라는 청소년들의 마음에 어떻게 애국, 애향심을 심을 것인가 를 잘 알았고 강건한 체력으로부터 건전한 정신이 생성된다는 원리를 익히 깨달았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장군에 대한 수많은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 지만 그 중에서도 유녀 천관과의 사이에 싹튼 사랑 때문에 무예연마에 등한히 하다가 어머 니 만명부인의 엄한 꾸지람에 깊이 깨달아 스스로 애마의 목을 자르고 깊은 산 동굴을 찾아 마음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명검과 무예의 기법이 담긴 천서를 주어 삼 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게 했다는 일화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게 했다는 일화며 삼국 통일 이후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랑이 당나라 군사들과 영토분쟁으로 싸우다 패하여 돌아 왔을 때 화랑의 계율인 임진무퇴의 정신을 어겼다 하여 부자의 연을 끊었던 일이며 이에 분 발한 원수랑이 심산유곡을 찾아 무예단련에 전념, 이윽고 백의종군, 홀로 적진에 뛰어 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 장렬히 전사한 설화 등은 감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무예사의 감격스러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무예의 꽃을 피웠던 우리의 무술은 이후 안정된 정치와 평온한 사회상으로 인하여 무술의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후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월등한 군사력을 지녔던 고려가 다시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 는데 고려의 역대 왕들은 무예의 기능과 활용에 대한 방법에 능통했던 모양으로 살생과는 거리가 먼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정책으로 장려함으로써 일반인의 무예 연마를 둔화시키고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만 비밀리에 신비하고 탁월한 무술의 비기를 단련함으로써 처음으로 일반과는 구분되는 궁중무술이 창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궁중무술 역시 그 시대에 급작스럽게 창조된 새로운 형태의 무술은 아니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고유의 무술을 집대성하여 그 중에서도 탁월한 술기만을 가려 뽑은 것이라 하겠다.

한일 합방 이후 사학자 안자산씨가 저술한 무사영웅전에 보면 우리 나라의 유술은 고려15대 숙종 때부터 점차 유행을 보아 그 호칭을 수박 또는 권법이라고 불렀다 하며 다시 인종 때 무사의 세력이 강대해졌을 때는 정중부 등이 군인의 상예로서 행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만 고구려와 신라의 벽화에 나타난 맨손 투기의 조각을 보면 고려 이전이 삼국시대에도 유 술기에 속하는 수박 호은 권법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문약한 정치와 문신우대, 무신 천시의 영향을 받아 민가와 장졸들이 연마하던 무예의 술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자 예종 4년에는 국자감을 설치하고 국자감의 7과목 주에 무학을 삽입하기도 했으나 오 히려 문신과 무신의 알력만 조성하게 되어 유명무실해 지고 말았다. 이후 무술은 더 이상의 발전이 막힌 채 가전기법으로 비밀리에 전수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조에 들어오면서도 정치체제가 바뀐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왕권만 바뀐 것이기 때문에 대부 분의 문물은 고려의 것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이조를 세운 이성계 역시 무력으로 왕권을 탈취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의 무예 연마에 많은 제약을 가하고 유약한 유교를 장려하였으므로 무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심지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은 선비 답지 못한 부끄러운 짓으로까지 알게 되어 결국 임진, 병자의 양대 외침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특기할 것은 국가에 대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우국충정에 넘치는 뜻 있 는 인사들이 다투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임란때 홍의장군 곽재우, 진주성 싸움에 김시민, 정발장군 김천일, 승군을 이끌었던 서산대 사와 사명대사등 수 없이 많은 의병장들이 구국의 깃발을 높이고 전설 같은 신기로 왜병을 무찌른 기록이 있다.

무예의 술기가 일조일석에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면 글을 읽고 불도에만 전념하던 선비와 승 려들이 어떻게 치열한 싸움터를 휘돌며 직업군인인 관군들보다 더 잘 싸울 수 있었을까?

당시 무술 계의 상하과 기록된 의병장들의 단편적인 어린 시절의 사생활을 들추어보면 그들 은 저마다 신체단련과 무예 연마에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예로부터 발달된 오늘날의 스포츠조차도 타인의 지도가 없으면 불가능하거늘 하물며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온갖 무예 의 술기를 그들은 어떻게 혼자서 익혔을까? 해답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그들의 집안에 대 대로 전해오는 신비한 무예의 비법을 기록한 책이 있었거나 비밀리에 그들에게 무예의 술기 를 지도한 숨은 스승이 있지 않으면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회상과 정치체제를 숙고해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조 때 한교는 전 래해온 우리 나라 고유무술의 비법들을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무예통지란 책을 저술하고 70 여명에게 무예교육을 시켜 임진란 때 응용한 바 있으니 아마도 오늘의 도장이라 하는 사설 체육관의 효시가 아니었을까? 이조 말기에 와서 부패한 정치체제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나 국제적 약육강식이 판을 치자 일부 자각한 민족지사들에 의하여 우리의 무예는 일시 빛을 보는 듯 했으나 신식 무기에 밀린 옛 무기들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으며 오직 맨손무술 만이 독특하게 빛을 보게 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우리의 무예는 근본으로부터 심각한 수난을 맞아 일시에 모 든 것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무예 사에 있어서 최대의 암흑기가 되었다 하겠다. 36년간의 암 흑기는 거의 한 세대를 이루는 긴 세월로 일제는 이 시기에 우리의 문화와 문물 뿐 아니라 그나마 명맥만 유지해 오던 우리 고유의 무예를 근본적으로 말살시켰으며 과거에 그들이 수 입해 간 우리민족 고유의 무예를 그들 나름으로 고치고 수정하여 역수출을 기도하였으니 오 늘날의 가라데, 검도, 궁도, 공수도, 아이기도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무예나 무술을 일종의 도로 본 것은 일본의 사고방식이며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기술 또는 기예로 인식하여, 투기 또는 심신을 단련하는 방편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의 사적인 기록을 보아도 무도, 궁도, 검도라는 말이 일체 없으며 한일합병 중기이후부터 도라 는 말이 쓰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도라는 말은 무예 또는 무술이라 는 말로 쓰였으며 검도는 검술, 궁도는 궁사 또는 궁술, 유도는 유술로 쓰였던 것이다.

8.15 행방 이후 우리 나라의 무예 곧 무술은 장족의 진보를 하였다. 숨어 있던 하나 하나의 고유무술의 술기가 빛을 보게 되었으며 저마다 독특한 무예의 술기를 들고 나와 무예 계의 군웅할거시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체계 없는 단일 술기의 개발에 불과 했으며 약간의 활동 이후에는 대부분 그 대로 잠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고유무술의 술기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온갖 스포츠 가 발달한 현대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적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며, 실사회에서 실직적 응용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